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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21-12-16
  • 조회1,095

 

  많은 알코올중독자들이 단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병원, 특별한 치료, 요양소, 보호시설, 종교단체 그리고 교도소, 그러나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고독, 엄청난 육체적 및 정신적 고통, 이런 것들이 알코올중독자들의 공통 운명이었습니다.

대부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엄청난 상실감을 맛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알코올중독자들은 술과 함께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알코올중독자들은 죽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알코올중독은 누구도 개의치 않고 찾아옵니다.

부자건 가난하건, 배운 사람, 무식한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모두들 똑 같은 방법으로 파괴를 향해 미친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 파괴성을 정지시키기 위해 알코올중독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기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제 수년간의 단주로 이글을 쓰고 있는 알코올중독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부터 길거리 술꾼이 되기까지, 이 부랑자가 드디어 위대하신 힘을 만나면서 단주의 길을 걸었고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가족을 다시 찾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화물자동차를 몰고 작은 산동네에 왔을 때, 내 헝클어진 수염과 더러운 머리카락은 내 허리까지 길게 자라 있었습니다.

나는 악취가 나는 파자마 윗도리 위에, 더러운 멕시코 판초를 걸치고 있었고 엉망으로 헤진 진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한쪽 부츠에는 칼을 집어넣었고, 다른 쪽에는 38구경 권총을 넣고 있었습니다.

6년 동안 나는 생존을 위해 최하층 빈민가에서 매일 술에 취해 싸움질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나는 오랜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체중은 50kg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비열한 술주정꾼이었습니다.

  

나의 알코올중독은 내가 열 한 살 되던 해에 나의 어머니가 괴한에게 난폭하게 살해되었을 때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아주 평범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어머니는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경찰에 신고가 되었고, 여러 날을 많은 사람들이 수색한 끝에 어머니의 죽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몸에는 잔인하게 손상된 부위가 많은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의심을 받았지만 현장에서 범인의 안경이 발견되어서 시간이 제법 흐른 후에 범인을 잡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사실과 다른 악성소문이 돌아서 학교 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집에서는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들의 관계 설정도 대 혼란이 있었고, 하지만 아무도 어린 나에게는 제대로 된 사실을 이야기 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 년 후에 아버지는 재혼을 했는데 제일 큰 형이 나를 맡기로 했습니다.

형과 형수가 나를 도우려고 노력했으나, 내가 너무나 방어적이어서 그들이나 그 누구도 내게 특별히 해줄 일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게 식료품가게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은 맥주를 훔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고, 나는 그때부터 고통을 없애는 수단으로 남들 모르는 음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비행 소년의 청소년기를 지난 후에, 해병대에 입대할 만큼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이 더러운 현실에서 도망을 치고 싶었고, 해병대에 관한 환상을 가지고 입대를 했지만 신병훈련소 생활은 상상하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훈련소의 정확한 시간 개념과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인간병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정말 큰 고통이었습니다. 

복무 계약기간은 3년이었고, 군 복무 중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전역을 할 때까지 받는 월급을 전부 술값으로 탕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밤 술집(bar)에서 나를 내 쫓을 때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주중생활을 했고, 주말에는 더 큰 클럽을 갔습니다.

이곳은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고정 단골이었고, 말싸움과 격투는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3년을 복무하고 명예제대를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건설회사에 입사를 해서 페인트칠을 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내 인생에서 음주는 일상적인 일과로 굳어있었습니다.

어떤 친구를 통해서 나는 한 여자를 만났고 그리고 그녀를 몹시 사랑해서, 곧 우리는 결혼을 했습니다.

일 년 후에 딸이 태어났고, 그리고 두 아들이 또 태어났습니다.

아! 나에게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자식들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재가 안 되는 나의 음주습관의 진행이었습니다.

나는 드디어 가족들과 같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부인은 이혼소송을 했습니다.

나는 술에 취해서 광폭해졌고, 출동한 보안관이 그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떠나라는 명령을 어기면 감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을 해서 눈물을 머금고 가정을 등진 체 정처 없는 방랑길로 떠나갔습니다.

나는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파산상태에 이르러서 거리를 방황하는 부랑자가 되어서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노상에서 쓰러지기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조금 남았던 돈도 술값으로 모두 탕진을 하고 부랑자 쉼터를 찾아서 몸을 누이는 곳을 찾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벌레가 우글거렸고, 음식은 형편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도둑놈들이었습니다.

나는 차라리 노숙을 하는 것이 났다고 생각을 해서 이곳저곳 몸만 누 일 곳이면 아무데서나 난 술을 마시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나는 매우 맹렬하게 싸움을 하는 사람이라고 주위 노숙자들에게 인식이 되어서 아무도 내게 시비를 걸거나 말을 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간혹 질이 낮은 범죄자들을 만나면, 움직이는 화물차에 뛰어오르는 방법이나 어떤 방법으로 구걸을 해야 효과적인지도 그들에게 한 수 배우곤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질과 손쉽게 사기를 치는 방법도 얻어듣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적잖은 돈을 만지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오직 술값으로 쓸 뿐이었습니다.

이런 부랑자 생활이 6년이나 이어졌지만 나의 생활 습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나는 거처할 곳이 전혀 없었지만, 술에 취해 비몽사몽인체로 미국을 세 차례나 노숙자의 신분으로 횡단을 했습니다.

아마 맨 정신이었다면 꿈도 못 꾸었을 그런 일이 알코올중독자인 나에게는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처참한 신분인 사람들과만 어울렸습니다.

그들이나 나는 정말 정상적인 일을 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한 모습이 꼭 쌍둥이들 같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자빠져버리는 행동도 아주 흡사했습니다.

어느 날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으로 술에 취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극심한 육체의 고통이 왔지만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로 이를 물고 걸어 들어갔습니다.

햇볕은 너무 뜨거웠고 그늘 한 점 없어 엄청난 탈수 현상으로 사람이나 동물조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사막 속으로 죽을 각오로 들어갔지만 내 마음대로 죽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과거에 같이 술을 마시던 부랑자를 만났는데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엄청 놀랐습니다.

그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양복은 너무 멋져보였습니다.

그는 나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고 자기는 지금 술을 끓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끓었는지, 얼마나 좋은지, 그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가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첫 번째로 들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서른 세 살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날 밤 그는 나를 데리고 알코올중독자들이 단주를 생활화하는 클럽으로 나를 데리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A.A. 이었습니다.

나는 엄청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멀쩡한 정신 상태로 서있는 알코올중독자들을 보았는데 과거에 그들은 나와 같이 모두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길거리 동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이들도 지금처럼 술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못할 이유는 없다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림이 올라왔습니다.

나는 그 날 밤 위대한 힘의 도움을 받는 기운을 느꼈습니다.

이상 하게도 그날 이후 술 생각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가? 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음주가 당신을 어떻게 했는가? 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이 나의 전체 태도를 변화시켰습니다.

물론 나는 정직하게 항복해야만 했고, 그리고 내가 알코올중독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나의 전처가 나의 아이들을 빼앗은 것에 대한 나의 분노를 포기하는 것에 어려움을 겼었고, 나의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에 대한 분노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를 버렸다고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원한들은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내가 술을 끓은 날 이후의 몇 달이 몇 년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 생계를 위해 한 잡지에 글을 쓰는 친구가 나에 대한 글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익명으로 쓰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언을 해주었고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그 무렵 벌써 나는 단주를 한지 25년이 지났지만 내가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시려는 지는 짐작조차 하지를 못했습니다.

나의 제일 큰 형이 그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익명으로 썼지만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에게 연락을 해 왔습니다.

이것은 현대판 기적이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 할 수 없었던 것을 신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것입니다.

형과 형수의 통화는 실로 30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는 울었고 형과 형수도 울었습니다.

그동안 나의 가족들은 나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죽었거나 아니면 미국을 떠났을 것이라는 추측들을 했다고 합니다.

형제들과 누이들에게는 한사람씩 모두 서로의 안부를 묻는 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형이 내게 나의 딸의 전화번호를 주었는데, 나는 그 아이를 못 본지가 27년간 이었습니다.

나는 딸아이와 통화를 했고, 다음에 두 아들과도 통화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경험이었는지 나는 그 후 며칠을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울며 지냈습니다.

잃어버린 세월에 슬펐고 그동안 상처받았던 나의 감정들이 올라와 울면서 기도를 했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 치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우리는 고향에서 커다란 가족 파티를 열었습니다.

우리가 헤어진 후 처음으로 함께 하는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위대하신 힘은 내가 술잔을 내려놓는 것으로 나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셨고, 그동안의 슬픔으로 상처받은 나의 가엾은 영혼을 구해주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포기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A.A.의 살아있는 증거가 바로 나라고, 나는 믿습니다. 

           

                     [외국경험담]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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