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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 번 이상 두 발로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22-01-13
  • 조회1,625

 

  우리 집은 5남매인데 남자는 저 하나입니다.

중학교 때는 운동으로 태권도를 했는데 특기생으로 고 1때까지 4년 정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운동이 너무 하기 싫어서 가출도 해보고 친구들과 본드, 가스흡입 그리고 담배를 일찌감치 가까이 했습니다.

그 시절 술도 가끔 마셨지만 별로 잘 마시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던 것은 공고에 입학을 한 후 부터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아버지의 직장관계로 주말부부였고 저는 주로 누나들과 함께 어머니와 같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채워지지 않는 가족 간의 정서적인 유대감이 부족했고, 그리고 저에겐 무엇인가 막연하게 심리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한 두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공고는 읍면 단위에 소재했는데 급우들 사이에서도 텃새가 아주 심했습니다.

거의 매일 싸우면서 치고받고 간혹은 심하게 얻어터지기도 했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싸운 친구들과 화해를 목적으로 분식집, 호프집, 당구장, 노래방 등등을 찾아다니며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간혹은 다리 밑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준비한 것이라고는 소주 2L페트병 하나와 콜라 2L페트병과 새우깡 한 봉지, 그리고 담배였습니다.

술친구들이 큰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라주면 받아 마시고는 속이 울렁거려서 다리 기둥을 부여잡고 오줌을 싸는 척 하면서 술을 토해내고 또 받아 마시고는 또 토해내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강한 척 해야 친구들에게 얻어맞지 않고 같이 어울려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방탕한 생활을 고등하교 3년을 거의 매일 쉼 없이 하다 보니 많이 괴로운 학창시절이었습니다. 

졸업 후 취직을 해서 직장 생활하던 중에 병무청에서 신검을 받았는데 이런저런 건강상의 이유로 4급 판정을 받고 현역 입대를 대신 해서 생산 공장에서 2년 동안 대체 복무를 하면서 군대생활을 마쳤습니다.

그 와중에 친구 형을 소개받았는데 지역에서 건달이었습니다.

그 형의 주선으로 직업을 구했는데 밤에만 일하는 유흥업소였습니다.

룸 사롱, 주점, 노래방과 마사지 클럽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의 20대는 이런 곳에 머물면서 철저히 타락을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술집에서는 부장이란 직함을 달고 하는 일이란 것이 술 꾼 중에 술 마시고 아가씨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혹은 술값 계산을 제때에 안하면 집까지 찾아가 온갖 악행을 부리며 돈을 악착같이 받아내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런 쪽 일들을 하다보면 당연하게 따라오는 것이 술, 여자, 담배, 도박이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365일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런 곳에서 흥청망청 살면서 아까운 20대와 30대의 청춘 시절을 허무하게 낭비했습니다. 

  

30대 후반에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고 결혼을 한 후에는 과거의 불법을 저지르던 어두운 생활을 접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에 취직을 해서 남들보다 더 빨리 출근을 했고 회사일도 열심히 하다 보니 주위에서 인정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얼마가지를 못하고 또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습니다.

개 버릇 남 못주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 속담은 제가 하는 음주행동이 딱 그 꼴이었습니다.

신혼생활도 끝나기 전에 이미 술은 다시 시작되었고 한 번 술을 입에 대면 과거보다 더 자주 술을 마시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아내도 내가 애주가려니 하면서 이해를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점점 심해지는 음주량과 횟수를 보고는 실망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밤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만 뜨면 술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술을 마셔야했고, 그러다보니 회사일도 나태해지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회사에 출근하는 것과 업무태도가 불성실하게 되었습니다.

밖에서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아내가 잔소리를 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미친 행동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살림살이를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예 회사 일은 내팽개치고 술만 껴안고 살다보니 아내가 누나들에게 나의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상의 끝에 누나들이 제안을 한 방법 중에 하나가 아내에게 나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보면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술을 안마실수 있는 방법이 있냐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너무 건강상태도 많이 망가졌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교회에 난생 처음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예배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것이 창피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남았습니다.

그 순간 짜증이 난 나는 또 술을 어떻게 마실 것인가 속으로 궁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따뜻하게 나의 손을 잡고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느냐.’는 위로의 말씀을 듣는 순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동안 제 손을 꼭 잡고 진심으로 나를 위로 해준 사람이 없었기에 그 순간 나의 마음을 벅차게 했나봅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른 날과 별다름 없이 아내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또 술을 마시고 소파에 쓰러져 잠을 잤습니다.

그 후로도 아내의 간청으로 몇 번 교회를 다니긴 다녔지만 나의 음주습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내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생각에 또 술을 마시는 것이 덜 미안했고 그럴수록 술을 마시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가끔은 술을 한번쯤 끓어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를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술 없이는 도저히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겐 술이 완전히 수면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일을 나가려면 밤에 잠을 자야하는데 잠을 못잔 이유로 출근을 못해서 돈을 못 벌면 누가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린단 말인가?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잠을 자야하고 그렇게 하려면 술을 마셔야만 한다.’는 합리화가 나의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건강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아내의 부탁과 강요에 못 이겨서 대학병원에서 종합적인 건강검진을 받아보았는데 결과는 예상보다 참담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간경화 초기에 들어섰고 앞으로 술을 계속 마시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담당의사가 주저 없이 했습니다.

그 당시 나의 음주량을 매일 소주 4~5병이었는데 그렇게 마시면 얼마 못가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소주는 독하니까 도수가 약한 막걸리로 바꿔서 적당량을 마시면 괜찮을 것이라는 조절망상이 슬그머니 올라왔습니다.

첫째 아내의 뜻대로 교회 참석하는 것과 둘째로 먹고 살기위해 돈을 버는 일, 그리고 셋째 잠을 자기 위해서는 반드시 술을 마셔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서 이 세 가지를 적절하게 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결과는 자꾸만 참담해졌습니다.

술을 마시면 필름 끓어지는 현상은 점점 심해졌고 헛소리와 헛것을 보는 환청과 환시가 수시로 찾아왔지만 비례적으로 술을 마시는 양과 횟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이제는 술 마시는 행위 자체를 전혀 통제를 할 수 없었고 아내가 출근을 하면 오전부터 해장술을 마시는 경우도 잦아졌습니다.

국밥집에서 해장술을 마시고는 그것도 부족해서 손에는 막걸리 여러 병을 슈퍼에서 사들고 귀가를 했습니다. 

그리곤 아픈 위장을 오직 술로 달래기 위해서라도 또 하루 종일 얼근한 취한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막걸리를 목구멍에 흘려 넣어야만 했습니다.

위가 아파서 다른 음식물은 몸에서 거부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막걸리는 잘도 넘어갔습니다.

  

10년 전 큰 화상사고를 전신에 당해서 서울 화상치료전문병원에서 엄청 고생을 하면서 여러 가지 화상치료를 했었습니다.

당시 흡연이 화상 치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말을 듣고 금연은 단 한 번에 성공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술은 전혀 그렇게 되지를 않았습니다.

한 달 정도 마신 막걸리 병을 세어보면 약 150병정도 되었습니다.

담배는 피우고 싶은 욕구가 전혀 없는데 술은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음주갈망감이 당겨서 하루라도 술 없인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겁이 나면서도 도저히 음주중단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 나의 간은 간경화로 붓다 못해서 단단해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을 했지만 그 두려움이 술을 마시고 싶다는 갈망 감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남들은 술을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고 즐기는데 나에겐 이제는 술이란 것이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완전한 독약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알코올성 치매라도 걸리면 가족들은 나를 격리시설에 가두고 돌봐주지도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죽고 싶은 감정도 수시로 들었습니다.

술을 두 번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각서도 여러 번 써보았지만 술을 몰래 마셨고 어두운 밤만 지면 헛것이 보여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이젠 완전히 미친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행동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광을 하다 보니 참다못한 아내가 그런 나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저의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그 동영상을 본 후 가족들은 내가 알코올중독에 걸렸구나 하는 것을 눈치를 채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병원에서 신경치료, 심리치료, 뇌 검사, 간 검사 등등을 한 번 다시 받아보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런 적당한 치료시설을 아내와 가족들 교회 사람들까지 나서서 수소문을 한 결과 낙점된 곳이 00병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추후 알코올중독치료병원으로 추천한 곳이 청주 예사랑병원 이었습니다.

처음에 가족들과 병원에 도착해서 원장님과 상담을 한 후에 간단한 약 처방만 받고 집으로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입원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입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술을 좀 마셨다고 이런 이상한 병원에 무슨 입원을 할 필요가 있느냐며 입원을 하더라도 집근처에 병원도 많은데 굳이 이 먼 곳에 소재한 병원에 입원을 하기는 싫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저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입원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 이제 상담도 받았으니 집에 가자면서 우기자 어머니께서 제 두 손을 꼭 잡으시고 우리 함께 한 두 달만이라도 같이 고생해보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어머니 눈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눈에서 그동안 제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의 치료에 대한 간절함이 보였습니다.

그동안 아들로서 아무것도 해드린 것도 없는 저에게 그렇게 까지 간절하게 치료를 원하신다는 생각에 이르자 어머니께 입원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저에게 ‘아들 고맙다’하시면서 같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알코올중독을 고쳐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입원을 하고 벌써 3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알코올중독치료를 받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상식적으로 전혀 몰랐던 알코올중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알코올중독 교육프로그램을 듣고 많이 놀랐는데 알코올중독이 ‘뇌의 질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상상도 못했고 단순하게 술만 마시지 않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앞으로 술을 마시지 않고 생활을 이어가려면 A.A.라고 하는 알코올중독자들의 단주모임에 퇴원 후에도 참석을 해야만 단주치료 효과가 극대화 된다는 교육내용이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은 치료가 만만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이 질병의 증상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저의 병원생활은 적응도 잘하고 알코올중독이라는 질병의 증상을 함께 하고 있는 환우 분들과 웃고 떠들고 식사도 잘하고 교육도 성실히 받으며 병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원하기 전에 정신병원의 고정관념도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인권유린이 난무하는 그런 곳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입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교육시간 중에 강의를 하시는 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코올중독 치료에 관심 없는 마음가짐과 변화된 행동 없이 ‘멍’ 때리다가 퇴원을 하면 또 다시 음주재발이 되어 또 다시 입원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고 하신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도 자신이 알코올중독자라고 본인이 말씀하셔서 처음에는 많이 놀랐습니다.

그분은 50대 중반에 처음 입원을 했는데 저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가 젊은 나이에 가족의 관심과 사랑으로 입원을 해서 그렇다고 하셨는데 처음에 그 말귀를 못 알아 들었지만 지금은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한 가지 약속을 해주셨는데 내가 퇴원 후에도 1년 동안 건강하게 단주생활을 하면 ‘병원 홈페이지’에 지금 쓰고 있는 이글을 올려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말씀에 힘을 많이 받아서 꼭 그런 시간이 오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열심히 단주공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알코올중독도 치료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맞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입원할 때는 아직도 새파랗게 젊은 나이게 알코올중독에 걸려서 치료를 받는 것이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함께 병동생활 하는 환우들 중에 나이가 50~60대 되는 분들 상당수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보면 저런 모습이 곧 알코올성 치매의 전조등상이 아닌 것인가 의심되면서 두렵습니다. 

정상적인 말과 행동을 못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다행인지를 새삼 실감합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생활을 조급하게 마무리하고 퇴원하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알코올중독치료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려면 충분한 연습과 또 행동의 변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퇴원을 하렵니다.

그런 시기가 와도 가족들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해서 퇴원을 결정하겠습니다.

[두발로 하는 단주행동]을 위해서는 배운 대로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단주의 길을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글귀를 다시 한 번 되 뇌여 봅니다.

저의 변변하지 않은 자아성장 경험담을 끝까지 보아주시고 들어주신 환우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알코올중독자 P

  

덧붙이는 글: 

저는 현재 퇴원을 한지 1년이 넘었고 오늘도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 이상 A.A.[단주모임]이 있는 곳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한 국가적인 방역문제로 인해서 지정된 모임장소를 제대로 오픈하지 못하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이럴때 마다 저는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이 모임에 참석이 여의치 못 할 때는 소재지 복지센터에서 면담을 대신 하거나 병원에 내원해서 원장님과의 상담도 받습니다.

또 한 신앙생활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단주생활은 머리가 아닌 오직 두발로 한다는 진실을 저는 믿고 또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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