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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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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8년도에 충북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성장은 부산에서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섯 살 때 타향살이가 힘이 드셨는지 부모님께서는 다시 충청도 음성으로 귀향을 하셨습니다.

당시 나는 부산사투리를 쓰다 보니 고향어른들에겐 그 사실이 퍽이나 신기했었나봅니다.

동네 어른들은 저에게 이런 저런 말을 시키시고는 어린 내가 내뱉는 부산사투리에 배꼽을 잡고 웃고는 하셨습니다.

동네 가운데 제법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동네 형들이랑 대나무로 낚시 대를 만들어 붕어를 잡곤 했습니다.

겨울철에 얼음낚시꾼들이 모여 들면 나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지렁이를 잡아서 열 마리에 10원 정도를 받고 팔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손수 얼음썰매를 만들어 주시면 나는 겨울동안 저수지에서 신나게 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반장 일을 맡으셨는데 가을추수 타작이 끝나면 경주를 비롯한 전국 명승지를 동네 분들과 여행하시기를 좋아하셨는데 귀향길에 내가 좋아하는 자동차 장난감을 사다주시곤 하셨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나에게 공부는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공부에는 별 흥미를 갖지 못했는데 아버지와 반대로 어머님은 나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산수와 구구단을 가르쳐 주시려고 갖은 애를 쓰셨지만 나의 머리에는 학습내용이 쉽게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오로지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해마다 동네에서 추렴으로 돼지를 두 마리씩 잡고는 했는데 아버지의 주도로 돼지의 멱을 따고 죽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서 아버지에게 그런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며 칭얼대기도 했습니다.

1974년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당시 북한에서는 학생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등교를 한다고 뉴스에서 나왔는데 그러자 우리나라도 초등학교에 지침을 내려서 녹색 깃발을 들고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등교를 하는 모습을 연출을 하고는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을 운동회가 열리면 가장 먼저 크게 외치는 단체구호가 ‘무찌르자 공산당과 때려잡자 김일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화형식이 있었습니다.

나는 공부엔 소질이 없었지만 학교출석은 1년 개근을 하였습니다.

어느 해 가을에는 아버지가 담배와 벼를 파신 돈으로 경운기와 삼성 T.V를 사오셨는데 그날 저녁에는 어김없이 금전문제로 부부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동네엔 겨울에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날 내가 6학년 때 우리 집은 청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해 겨울 졸업식 날 어머니가 나와 동생에게 사주시는 짜장면을 난생 처음 먹어 보았는데 신천지의 맛이었습니다.

추첨을 통해서 청주중학교를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우리세대가 교복을 입는 마지막 세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 반 급우들 수가 60명 정도였는데 성적순은 중간보다는 약간 밑에서 노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고등학교를 인문계 입학은 어려울 것 같아서 공고나 상고를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욕심이 발동을 하게 되어서 나의 성적에 알맞은 변두리 소재 후기 인문계 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돌 머리들만 모여서 그런지 우습게도 나의 입학성적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웃지 못 할 촌극도 벌어졌습니다.

  

내가 고 2때 당시 아버님이 대형극장 청소 일을 하셨는데 루머치스 관절염이란 병환으로 갖은 고생을 하시던 때라 집안 살림이 극도로 기울어서 나는 자퇴를 했습니다.

당시 대한통운이라는 운수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첫 월급이 8만원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지금 학교에 다니는데 난 도대체 무얼 하는지 하는 자괴감에 빠져서 부모님을 원망도 했습니다.

내가 주로 담당하는 일은 시멘트를 실어서 나르는 대형 트럭이었는데 하는 일은 노련한 운전수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조수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끔씩 나에게 담배 한 개비와 술 한 잔 씩을 건네주고는 했는데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하라면 하는 것이 법인 줄만 알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담배는 이미 학창시절에 배웠기 때문에 피우는데 별로 부담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월급이 15만원으로 올랐지만 나는 월급은 받는 대로 어머니에게 모두 드렸습니다.

조수제도가 없어지면서 할 수 없이 회사를 그만 두었는데 퇴직금 50십만 원을 수령한 그 돈도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네가 부모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다.’고 하시면서 나를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2년 후에 1종 보통면허를 따게 되었는데 운전이 나중에 군생활로 이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2급 방위판정을 받았습니다.

나는 방위생활은 죽기보다 싫어서 현역으로 자원입대를 해서 88년에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하였습니다.

처음에 수송대대로 배치를 받았지만 내가 대한통운에서 운전한 근무경력이 참작되어서 공병 대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공병대에서 트레일러와 덤프트럭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엔 구타가 암암리에 존재하던 시절이라 이런저런 이유로 졸병 때엔 수시로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군복무 8개월 후에 일병 정기휴가를 얻어서 고향집에 왔는데 동생이 가출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정신상태가 일반인과는 다른 아주 소심하고 움츠러드는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말하는 왕따였습니다.

15일 휴가기간 동안 동생을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해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상병시절에 나온 휴가도 동생을 찾아보려고 전라남도 신안군 소재 염전 밭을 해매이며 생사를 확인해 보았지만 동생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한 후에 굴삭기와 지게차 면허를 한 달 만에 취득을 하게 됩니다.

그해 아버지는 상가 집에 문상을 다녀오시다가 도로에서 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가해차량 운전자가 초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정말로 미쳐버리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사망 합의금으로 그 당시 전세로 살던 집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26세에 00모직회사에 버스운전기사로 입사를 해서6년 간 착실하게 근무도 하고 퇴직 후 열흘간만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청주터미널 소재 고속버스 운전기사로 또 다시 취직을 해서 또 다시 회사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인생사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00모직에서 근무당시 교제를 하던 여성이 있었는데 상대가 너무 적극적이라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바로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의 모든 것을 믿었기에 카드와 통장을 맡겼는데 이것이 일생일대의 최대의 실수였고 착각이었습니다.

동거한지 1년 만에 오천만원이란 빛을 남기고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여러 카드 회사에서 수시로 빛을 청산하라는 독촉전화가 와서 도저히 회사 업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중에 무일푼이던 나는 할 수 없이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고 어머니가 나서서 여러 카드회사 담당자들을 집으로 부르셔서 이자는 탕감해주는 조건으로 원금을 모두 갚아주셨습니다.

어머니에겐 고마움과 죄스러운 감정이 함께 몰려왔습니다.

그 후 13년간 고속버스 운전기사로 충실히 근무하다보니 퇴직당시 그 동안 저축한 돈과 퇴직금을 합쳐서 어머니께 신세진 돈을 모두 갚게 되었습니다.

퇴직 후 관광버스를 매입해서 직접운전을 하면서 들어오는 수익금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월급생활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렇게 3년쯤 운영을 잘하다가 그만 전날 음주를 했는데 다음날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알코올 수치는 운전면허 취소수준인 0.127이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경찰서에 면허증을 반납하고 나오는 길에 소주 2박스를 사들고 망설임 없이 여관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지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음주의 시작이었고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변한 시작점이었습니다.

며칠을 식사도 안하고 소주만 계속 마셨습니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보니 청주소재 00병원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다가 정신이 들었습니다.

침대 옆에는 어머니와 외삼촌이 계셨는데 사실대로 그간의 음주교통사고난 일을 말씀을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들이 사고버스를 수리를 한 후에 매도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처분을 했습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벌금통지서가 우편함에 있었는데 벌금액수가 4백만 원이었고 곧장 은행으로 가서 납부를 했습니다.

그날로 정동진으로 머리도 식힐 겸 여행을 떠났습니다.

면허 취소로 1년간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공사현장에서 자재정리를 하는 일당 일을 하게 되었는데 몸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오후 4시30분에 작업을 마치고 손에 쥐는 수령액이 10만원이었는데 그중에 1만원을 소개사무실에 주고 나머지 돈 9만원은 바닥이 날 때까지 담배와 막걸리만 사다 마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마시는 술이 소주에서 막걸리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한 이틀 정도 일하고 18만원이 모이면 또 그 돈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담배와 막걸리만 사다 마시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한 번은 또 새로운 마음으로 일주일 열심히 일해서 63만원이 모였는데 그 돈도 다 떨어질 때까지 한 달간 오직 담배와 막걸리를 용량이 큰 것으로 하루에 서너 병씩 사서 마셔대곤 했습니다.

물론 식사는 거의 하지를 않고 술만 주야장창 마시다보니 체력이 바닥을 치면서 그 알량한 노동일도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일을 나가는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그 후 어머니한테 매일 1만원씩 타서쓰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루에 담배 값과 막걸리 3병이면 딱 만원이었습니다.

하루는 참다못한 어머니가 소주 한 병을 사가지고 오셔서는 “너 죽고 나도 죽자.”고 하자면서 병나발을 부셨습니다.

그리고는 서럽게 우셨습니다.

원래 술을 못하던 분이었기에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나 역시 술에 취한 상태라 멍하니 그런 어머니를 쳐다 만 보았습니다.

그 후에 어머니가 용돈을 주지 않게 되자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직접 차를 몰고 양조장에 가서 박스 채 막걸리 사다가 마셨습니다.

마치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내 머릿속에 막걸리 양조장의 막걸리들만 떠오르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고 그곳 양조장으로 향하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동네 슈퍼에서 외상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네에는 슈퍼가 두 군데 있었는데 모두 나와 거래를 하던 곳이라 10만원까지 술 외상을 주었습니다.

외상술값 십 만원이 다되어 가면 또 인력사무실에 며칠 나가서 일당을 벌어서 갚고는 또 외상술을 시작하는 그런 생활이 어느덧 4년이 이어지면서 무의도식으로 보냈습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어느 날 어머니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셨는데 검사결과는 폐암말기라는 판정이었습니다.

병실에는 외삼촌과 이모님이 계셨는데 나에게 많은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입원생활을 얼마 하지도 못하시고 향년 75 세로 영면하셨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너무 허망했고 눈물도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새벽부터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 시신은 화장을 해서 천주교 묘지에 안치시켜 드렸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는데 그때서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서 이모님이 얼음찜질을 해주셨습니다.

  

동생이 가출 후 10년을 기다리다가 가출신고를 했는데 어머니 사망신고를 할 때 동생 사망신고도 함께 했습니다.

피붙이들의 서류를 정리를 하고나니 허무함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슬픔에 빠졌다는 핑계로 또 막걸리만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나의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감기인줄 알고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대와 감기약만 처방을 받아서 복용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까지 떨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현상이 알코올중독 증상인 것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술을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 떨림이 바로 멈추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손만 떨게 되면 곧바로 술을 마셨습니다.

하루 종일 방안에 처박혀서 술만 마시다보니 방구석은 빈 술병으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모와 삼촌이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고 알코올중독병원에 입원을 하여서 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하셨지만 난 한마디로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이모님의 간곡한 설득으로 추석차례를 지내고 다음날 예사랑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로 시작된 병원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입원 후에 일주일동안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와 내가 어쩌다가 지금 이 지경으로 되어버렸는지 도무지 현실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처음엔 병원생활에 적응을 잘 못해서 힘들었지만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라고 차츰차츰 현실에 적응을 하며 단주교육프로그램에 참석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내용 자체가 나의 의식수준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를 않아서 흥미를 잃고 우왕좌왕 하기도 했습니다.

수시로 이모님과 삼촌이 면회를 오셨지만 가끔 올라오는 분노와 병원생활스트레스로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병실 환우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유일한 낙은 담배 한 개비였습니다.

저녁식사 후 환우들과 함께 하는 윷놀이가 기분전환을 하는 오아시스 역할도 했습니다.

꼬박 8개월을 입원생활을 하고 퇴원을 하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시간만 죽이고 병원 문을 나서는 기분이었습니다.

  

퇴원한 날 저녁 친구들을 술집에서 만나 곱창전골을 시켜놓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다음날 술이 덜 깬 ‘참새’는 방앗간인 양조장에 들러서 막걸리 4병을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 두부김치를 안주로 해서 그날로 네 병 모두를 마셔버렸습니다.

또 다시 술을 마시는 것은 계속되었고 재입원을 할 때까지 주야장창 말 그대로 장취에 들어간 것입니다.

한 날은 삼촌께서 이렇게 망가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온갖 욕을 하시면서 다시 입원을 하자 하셨고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고 여러 말 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삼촌이 집으로 돌아가시자 나는 다시 입원을 하면 한 동안 술을 못 마실 것 같은 조바심에 막걸리 5병을 사서 입원전날 모두 마셔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비몽사몽간에 삼촌 손에 이끌려서 두 번째의 입원생활이 시작됩니다.

입원해서 며칠간 회복실에 있었는데 난생 처음 환시와 환청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그 느낌은 너무 끔찍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간호사님을 붙잡고 형광등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한다고 하소연을 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을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진전섬망증세란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정신을 차리고 병실 배정을 받고 보니 먼저 입원생활 때 알게 된 환우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두 번째 입원생활에서 받는 교육내용은 첫 번째와는 다르게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단주의 열망을 갖고 교육에 참석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녁식시 후 즐기는 윷놀이 하는 시간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의 병원생활 2개월을 마무리하고 퇴원을 했습니다.

퇴원을 한 날 이모님이 용돈을 하라고 5만원을 주셨는데 그날 마트에서 식료품과 소주 2병을 사서 김치찌개를 끓여서 마셨습니다.

음주 행태가 막걸리에서 소주로 다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술에 미친 참새는 술 이름만 바꾸었지 또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한 병이 두 병 되면서 또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친구 2명과 횟집에서 소주 6병을 나누어 마시고 집에 와서 맥주 8병 소주 4병을 소맥으로 만들어서 원 없이 마셨습니다.

문득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공포심이 올라와서 이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의 입원생활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새롭게 술 없는 인생으로 바꾸어보자는 일념으로 교육에도 열심히 참석을 하고 있고 지금 쓰고 있는 ‘자아성장’도 정직하게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빅북 32쪽을 보면 

“우리들 대부분은 술을 마시던 초기에 자신은 언제든지 단주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라도 늦기 전에 단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알코올중독자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머리에 번쩍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 역시 글의 내용과 똑 같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까지 술을 마시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알코올중독자들은 아무 때고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술을 끓을 수 있다는 음주조절망상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환우 분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들을 하면서 음주들을 하였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한 번 알코올중독자면 영원한 알코올중독자”란 것도 빅북에 실린 단주교육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하루하루 24시간씩은 술을 안마시고 살아 갈수는 있으나 앞으로 영원히 술을 끓고 살아갈 수 있다고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알코올중독의 증상이란 것도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알코올중독은 뇌의 질병이며 진행성임과 동시에 가족 병을 동반하는 영적인 병이란 것도 아주 조금씩 이해가 되면서 지금은 받아들입니다.

12단계 중에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우리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라는 1단계가 있습니다.

나는 1단계를 시간이 날 때마다 읽으면서 60% 정도는 현재 받아들이는 자세로 전환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느덧 벌써 예사랑병원에 세 번째 입원입니다.

나는 이것을 밑바닥치기라고 인정하면서 단주공부에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병원생활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단주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남은 병동생활 열심히 교육에 참석을 하고 후회 없이 마무리를 잘하고 퇴원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단주의 꿈을 향해 행동과 실천으로 전진하겠습니다.

“고통은 겸손을 가져오고 그 겸손은 고통을 치유한다.”

하루하루 정직과 겸손함을 배우면서 오늘도 병동생활을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알코올중독자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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