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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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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M 버그먼이고, 나이는 55세 여성이며 국적은 스웨덴이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대한민국이며 부산 초량동이고 한국 이름은 박은희다.

입양당시에 신분보증용으로 찍힌 흑백사진에 갓난아이 가슴에 놓였던 종이에 생년월일과 박은희이란 이름이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친부모님이 이름이나 얼굴을 전혀 기억하거나 알지 못한다.

1965년에 태어나서 3살까지 보육원에서 성장을 하다가 생후 35개월 무렵에 유럽행 여객기를 타고 경제적으로 다복한 중산층 가정에 국제입양아가 되었다.

만 세 살이라 한국어를 제법 배우다고 입양이 되어서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을 했는데 사투리처럼 부산억양이 조금 섞여 나와서 가족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는 했다.

양부모님 중 어머니는 사범대 교수님이셨고 아버지는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는 엔지니어이셨다.

형제로는 개구쟁이 오빠로 5살 많은 남자아이가 있었고 인형같이 생긴 언니는 나보다 3살이 많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님은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 살기 위한 길 중에 하나로 당시 가난한 나라의 어린 여자아이인 나를 따듯한 마음으로 받아주셨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던 유모차와 세발자전거를 타보는 행운도 맛보았다.

양부모님이 외출할 때 아버지는 항상 나를 자기어깨에 무등을 태우고 사람들에게 어린 나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행운의 선물이라며 자랑을 하시곤 했다.

어린 시절은 이토록 지극히 행복했고 평범한 가정의 일상에서 부족함 없는 어린 여자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만 6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당시 머리는 검고 얼굴이 노란 동양인은 학급에서 내가 유일했다.

물론 머리가 곱슬거리는 아프리카계 어린아이나 히잡을 머리에 쓴 아랍 쪽 여자아이는 간혹이나마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로는 한국계 입양아들이 물밀 듯이 많이 북유럽 여러 나라로 입양되는 시기도 한동안 유지되기도 했었다.

1976년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때 베트남 어린아이들도 우리 동네 여러 집으로 입양이 되기도 했다. 

당시 스웨덴 당국과 학교에서는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국가 정책으로 철저하게 금지하는 분위기여서 큰 어려움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수업 과목 중에 특히 수학과 언어 학습능력이 뛰어나서 양부모님을 아주 기쁘게 하게도 했다.

영어는 기본이고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러시아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서 해당되는 나라에 교환학생으로 뽑혀서 항상 바쁘지만 즐거운 생활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항상 우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서 전 학년 장학금은 물론 졸업 때는 전교생과 선생님들 앞에서 학교 대표로 졸업 축사를 했다.

양부모님은 당시 너무 행복하다면서 나의 양 볼에 끝없는 입맞춤을 주셨다.

오빠와 언니도 자기들 일처럼 나를 끌어안고 진심으로 몹시 기뻐했다.

친구들은 간단하게 담배나 술을 자주 즐겼지만 나는 한 개비의 담배나 한 모금의 술도 절대로 입에 대지를 않았다.

그런 나에게 운명의 장난이 정말 설마처럼 다가왔는데 바로 대학신입생 환영파티장소였다.

장학생으로 일류대학을 갔지만 성인한 된 내가 환영리셉션 장에서 홀로 떨어져서 미네랄 생수만 마시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다.

그때 처음 보는 남자신입생이 나에게 같이 왈츠를 추자고 하면서 한잔의 와인을 건넸는데 거절은 못하고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홀짝거렸는데 술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생전처음 맛본 와인이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자 춤을 추는 현재의 모든 상황이 아주 다르게 해석되고 꿈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남학생이 춤을 추면서 나의 귀에다 무슨 말을 하는데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18살이 된 여자인 내 몸에서 야릇하게 반응하는 이성에 대한 섹스에 관한 호기심과 흥분이 먼저 다가왔다.

남학생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귓가와 목 언저리 그리고 등줄기에 쭈뼛 소름이 돋는 이상한 경험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신입생파티에서 그런 경험을 한 후에 그런 짜릿한 기분을 즐기고 싶어서 남 몰래 혼자서도 조금씩 술을 마시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술만 마셔서는 완전한 성적인 기분을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자위하는 방법과 그럴 때에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구들 구입을해서  사용했다.

특히 남성의 하체처럼 생긴 물건에 호기심을 갖고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나의 몸이 시키는 대로 위안를 해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약간의 수침심이 들기는 했어도 스웨덴의 일반적인 문화는 성인이 된 남녀 누구나 성과 관련해서 어떤 것도 개인적인 문제로 인정하기 때문에 고민거리는 아니었다.

술과 자위로는 채우지 못하는 허전함이 있어서 왈츠를 추던 남학생과 계약동거를 시작했다.

남학생과의 동거는 또 다른 별천지를 만나는 것과도 같았다.

아주 젊은 우리는 시간과 장소가 맞으면 아무 때고 서로의 몸과 마음을 원했고 주저 없이 섹스를 즐겼다.

그러나 술 없이 하는 섹스와 적당한 음주를 하고 하는 섹스는 전혀 다른 느낌과 감각적인 쾌락이 달랐다.

이때까지도 일상생활이나 대학교생활은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 출강이나 학과시험 그리고 성적도 장학금을 받는 미래가 촉망되는 대학생이었다.

술과 함께 즐기는 섹스가 어느 시점부터 조금씩 시들해지기 시작을 했다.

서로가 상의 끝에 파트너를 바꾸기로 결정하고 계약내용 중에 한 가지 이유가 충분해서 미련없는 이별을 했다.

 

다음에 만날 이성은 의식적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원했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났는데 전직이 아이스하키 선수로 신체가 아주 건장했다.

11살이 많았는데 출생이 이집트인이었으며 피부가 진한 구릿빛으로 매우 호남 형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그가 약물과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심한 섹스중독자였다.

체력적으로 나는 그 사람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엄청났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술과 약물의 효과였다.

상대를 하다가 내가 기운이 딸린다 싶으면 그는 항상 나에게 은근히 약물을 권했는데 나는 술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나도 주사기로 팔뚝에 약물을 찌르는 상황이 되었다.

절정의 극치 감을 느끼려고 약물과 알코올을 혼용해서 사용하다보니 어느 시점부터 나의 의지대로 음주의 횟수와 양이 조절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나를 상대를 하면서도 기회가 되면 남녀가 여럿이서 즐기는 혼음[混淫을] 즐겼는데 나도 거기에 호응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완강히 그것 만은 거부를 했다.

 

또 다시 이별 후에 마음을 다잡고 술 마시는 횟수와 양을 줄이고 학업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나의 정신건강상태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식사대신 술을 마셨고 어느 날부터 손끝에 약간의 경련이 느껴지더니 포크나 접시를 잡으면 손을 떨기 시작을 했다.

술을 마신 어느 날엔 잠자리에서 오줌을 싸서 침대 매트리스를 못 쓰게도 했다.

술에 취하면 중간 부분이 생각이나 행동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흔히 말하는 '블랙아웃' 상태가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나의 정신력과 체력에 한계가 오자 대학생활과 학업에도 점점 소홀해지고 알코올에 점점 아주 깊숙이 빠져들면서 일상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학점은 난생 처음으로 부끄러울 정도로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고, 학기마다 시험을 봐야하는데 결과의 두려움이 앞서다보니 찾는 것은 또 술이었다.

지도 교수님과 심리적인 상담도 하고 정신과약도 처방을 받아서 꾸준히 복용을 했지만 중간 중간에 마시는 술 때문에 형편없는 결과를 봐야만 했다.

환청과 환시도 동시에 오기도 하면서 일상이 지옥과도 같았다. 

이러다가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두려움에 국립병원정신과에서 진료와 상담을 받기로 했다.

참담하게도 진료결과는 '알코올중독'이었다.

알코올중독치료약물의 정기적인 복용과 반드시 알코올중독치료자 모임인 A.A.에 참석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씩 전문의에게 정기적으로 상담치료를 받도록 조치가 되었다.

그러나 약물과 상담을 받으면서도 중간 중간 음주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A.A.는 참석해볼 생각을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하는 시간에는 비교적 정직하게 음주사실을 털어놓았다.

주치의가 하루는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

지금처럼 시간과 경비를 들여서 하는 진료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단주자모임 즉 A.A.에서 활동하는 것이라고 강조를 했다.

그곳에 가면 당신같이 술로 고통 받던 많은 사람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앞으로 당신이 술을 안마시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얻고자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고 여러 번 힘주어 말했다.

어째서 쉬운 길을 두고 굳이 힘든 길을 걸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결과적으로 손해는 자기 자신이 보는 것이란 말도 함께 해주었다.

 

그래도 나는 나의 의지와 신념으로 알코올중독에서 빠져나오겠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으면서 시간만 허비했다.

이젠 전에처럼 술을 마실 수도 없어서 어떤 때는 보드카 반병을 마시고 길을 가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하곤 했다.

대학도 졸업을 못하고 휴학계를 내고 술을 마시면서 버티고 온 세월이지만 현재보다 미래가 더 불안하고 우울했다.

생후 35개월만에 먼 이국땅에 입양을 와서 청소년기에는 집안에 자랑거리가 되었던 적이 분명하게 있었던 내가 어쩌다가 술이란 마술에 걸려 현재 이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나와는 생긴 것도 전혀 다른 사람들 틈에서 산전수전 모두 겪으며 살아온 나의 흔적이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지워지고 마는 것만 같을 흉몽에 진저리를 쳤다.

전날 음주로 불면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온몸에 힘이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아서 호숫가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다가왔다.

어디서 본 듯은 한데 누구일까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니 남자가 웃으면서 나의 손을 잡으며 우리 ‘왈츠’ 한번 추실래요?

아! 바로 그 남자였다.

대학신입생환영파티에서 나에게 한잔의 와인을 건네며 같이 춤추기를 원하던 해맑던 그 청년이 지금 말쑥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와 이별 후에도 항상 나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마침 어떤 자리에서 나의 근황을 듣고 지금 찾아왔노라고 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도 잘 알다시피 자기도 음주를 함부로 즐기다가 알코올중독판정을 받았는데 다행히 지금은 A.A.에 참석하면서 오늘까지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고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에 나와 섹스를 즐기려면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살던 그가 현재 한 잔의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일상생활을 살고 있다니 거짓말 같았다.

나는 아직도 섹스와 관계가 없어도 술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는 거짓의 그림자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혹시 A.A.에 관심이 있다면 자기가 그곳으로 지금 나를 안내를 할 수 있다면서 유쾌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오후 5시에도 근교에서 A.A.가 열리는데 지금 나하고 그곳으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시간에 맞추어서 걸어가자고 제안을 했다.

 

둘이 걸어서 알맞은 시간에 도착한 곳은 본당이 그림같이 멋진 성당별관이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나보다 어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조금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녀와 중년의 중절모를 쓴 신사 몇 사람도 보였다.

한쪽 교탁에는 간단한 음료수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두툼한 책자가 여러 권 보였는데 표지에는 이렇게 제목이 쓰여 있었다.

‘ALCOHOLICS ANONYMOUS’

난생 처음 보는 책이었고 책 제목이었다.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참석한 사람들이 이 책을 부분적으로 나누어서 돌아가면서 읽는 것이었는데 마침 제목이 ‘알코올중독에 대 해 좀 더 알아보자’였다.

[우리 알코올중독자들은 술을 조절할 능력을 상실한 남녀들이다. 

진짜 알코올중독자들은 결코 그 누구도 술을 조절할 능력을 영원히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알코올중독자들은 (술을 마시는 한) 모두가 나날이 증세가 악화되어 가는 진행성(進行性)병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날지라도 우리는 (술을 마시는 한)더 나빠질 뿐이며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다리가 잘려 나간 불구자와 같다.

잘려진 다리가 새로 나올 수 없듯이, 알코올중독자를 다른 사람과 같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치료법도 나올 수 없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치료 방법을 다 동원해 시도해 보았다. 

어떤 경우에는 잠시 동안은 회복되는 것 같이 보였지만, 곧 되돌아가서 전보다도 더욱 나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알코올중독과 관련된 전문 의사들은 알코올중독자들이 정상적인 음주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과학이 언젠가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이런 내용의 글들을 곰곰이 읽으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글의 줄거리가 모두가 알코올중독자인 나를 꾸짖듯 아니면 절규하듯 다가왔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A.A.의 속에서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몽환적인 세상을 보았다. 

A.A.에서 참석한 그날 구입한 ‘ALCOHOLICS ANONYMOUS’란 책을 집으로 들고 온 그날로 온 밤을 꼬박새우며 완독을 했다.

물론 내용을 충분히 모두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내가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이란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이제 술을 마시는 행동을 멈출 수도 있겠구나 하는 짜릿한 감동을 충분하게 느꼈다.

 

25세에 마주한 A.A.와의 축복된 만남에 모든 영광을 돌린다.

어느덧 현재 술 없이 산 세월이 30년이 흘렀다.

대학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해서 어학전공을 살려서 외무부에서 근무하고  근무 평점도 아주 좋게 받고 있다. 

그동안 나에게 첫 왈츠를 가르쳐 준 남자와 결혼을 했고 우리 둘은 약속대로 자식을 낳기보다는 입양을 하자고 결정을 했다.

남자아이 하나는 남미에서 여자아이 둘은 아시아에서 입양을 하여 건강하게 키우고 성장을 시켜서 현재는 자기들 길을 젊은이들답게 씩씩하게 걸어가고들 있다.

 

A.A.에서 나에게 선물로 준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술 없이도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주춧돌을 놓아준 위대한 힘께 오늘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어떤 사람은  A.A.에 참석을 하면서 여러 번의 좌절과 실패 그리고 음주재발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나는 다른 경우였다.

신입생파티에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사랑을 온 몸으로 느꼈듯이, A.A.라는 곳으로의 단 한 번의 참석에서 정수리에 벼락이 치듯 지금부터는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선택과 책임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받아들였다.

생후 35개월에 동양의 먼 나라에서 이 머나먼 북유럽까지 입양을 온 이유는 분명 지금 내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야할 존재임 만으로도 충분한 까닭이리라.

‘내가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심은 분명히 그분의 온전한 숭고한 뜻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해준 친부모님은 어떠한 모습일까 상상으로만 그려보지만, 지금 나를 사랑의 힘으로 이만큼 있게 해준 존경하는 양부모님과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나의 뿌리가 어디에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하는 것은 정체성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된 것은 여러 가지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주 어릴 때 나 혼자만이 세상에서 뚝 떨어져 있었다는 고독감이 가장 컸으리라고 인정한다.

‘세 살의 경험과 무의식의 세계가  평생 성격과 습관이 된다.’는 스웨덴 격언이 있다. 

세상에 나온지 35개월의 어린여자 아이가 느꼈을 서러움과 분노심은 어린애의 무의식으로 녹아들어갔으리라.

훗날 시간이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되어갈 때 검은 상처를 감싸주면서 한 동안 친구가 되어준 술을 만나서 찰나의 방황이 있었을 뿐이었으리라.

나는 지금 나에게 환희와 슬픔을 같이 선물한 술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의 삶의 전체를 정확하게 ‘자아성찰’을 할 기회가 축복으로 주여졌다.

‘신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는 대신 믿음과 용기를 갖게 될 기회를 주신다.’고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니라 잡는 것이다.'라는 진실을 믿고 또 믿는다. 

그리고 믿음이란 것은 용기있게 행동하는 사람의 몫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조상의 뿌리를 찾기보다는, 어쩔 수 내 자아의 뿌리를 찾아서 ‘내가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신’ 오늘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펜을 놓는다.

 

                  [외국경험담] *** M. 버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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