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경험담

  • 커뮤니티
  • 회복경험담

Notice: Undefined variable: _memberID in /www_root/admode/module/board/board.php on line 338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23-05-11
  • 조회233
 

2019년 초여름 밤에 잠을 설쳐서 일어난 시간이 새벽 5시경이다.

어김없이 주방 냉장고를 열어 보았지만 마실 것(?)이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집 근처가 아닌 조금 먼 거리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매일 만나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얼굴 보기가 창피했던 이유일 것이다.

소주(640ml) 2병을 사서 들고 담배를 피우며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런 행동이 부끄러운 정신이었는지 한 병을 차에 두고 한 병만 들고 집으로 올라왔다.

글라스에 가득 한 잔을 따라서 소파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온몸을 어찌하지 못해서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육신을 진정시키고 T.V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6시에 어김없는 아내의 기상과 성모상 앞에서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그녀의 일상적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한마디 한다.

여보 오늘 병원에 가자!’

왜요? 소주를 마시면 다 괜찮아진다고 하더니 아닌가 봐요?’

‘............’

왜 소주로는 심신의 안정상태가 안 돌아와요!’

아내는 눈을 흘기며 안방에 들어가서 매일 반복하는 그녀의 건강한 아침체조를 한다.

나는 허둥지둥 대충 아침밥을 챙겨 먹으면서 술잔을 홀짝거리며 아내의 눈치를 본다.

아직도 잠에 빠져서 있는 아들을 깨우고 옷가지를 챙겨 차로 향했다.

어디로 가요? 지난번 그 병원? 아님 충북대 병원?’

지난번 그 병원힘없는 나의 대답이다.

지난 13주간 입원 치료를 받았던 [예사랑병원]으로 지금 가는 중이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서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안 되겠다. 그냥 집으로 가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사람 잠도 못 자게 하구선!’

아들 녀석의 원망이다.

잠시 머뭇거리는데 덩치 좋은 아들 녀석은 내 손을 잡아 끌고 병원 문을 들어섰다.

또다시 시작된 두 번째 병원 생활이었다.

 

19715월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딸을 내리 넷을 두고 시집살이에 고생이 많으셨던 어머니의 막내아들로 나는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지극정성과 과잉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가장 큰 누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세상으로 갔고 내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더 태어났다.

여하튼 여동생까지 딸 넷의 틈바구니 속에서 난 온 가족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럭저럭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 시내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서 나름 유학 생활을 하게 된다.

고교 시절도 친구들은 자취나 하숙을 하면서 독립심이나 생활 능력을 키우는데 반해서 나는 대학생 누나들의 보호 아래서 별 부족함 없이 어린아이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대학도 진학했고 적어도 또래들이 하는 대로 졸업을 했고, 결혼도 하고, 아들과 딸도 낳다 보니 주변에서 아무 걱정거리도 없는 집이라는 평판을 듣곤 했다.

내가 어릴 적 농촌 지도소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과 퇴근을 하셨다.

그리고 거의 매일 술을 드신 상태로 퇴근을 하셨다.

저녁마다 내가 늘 하던 일은 아버지를 모시러 자전거를 타고 마중을 나가는 것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길거리에서 구멍가게 비슷한 술집이 서너 군데 있었는데 그중에 한 군데서 언제나 친구 분들과 술을 드시는 아버지를 발견을 하고는 했다.

부자지간에 자전거를 나란히 끌고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종종 다투시는 일도 일상화 되었다.

급기야 1992년 위암 선고를 받으신 아버지는 수술과 회복을 잘하시고 그 후 10년 넘게 단주를 하시며 정년퇴직을 하셨다.

퇴직 후에는 얼마간의 농토를 손수 일구시며 소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다시 술을 드셨다.

결국 완치라고 믿었던 암까지 재발하여 결국 운명하셨다.

 

대학 생활을 되돌아보면 청운의 부푼 꿈보다는 술을 더 가까이 하며 생활했다.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술을 멀리할 법도 하건만 오히려 그러지 못하고 동기들이나 동아리 모임에서는 술 잘 마시는 아이로 통할 정도로 술자리에는 빠지는 일이 없었다.

졸업 후 회사생활도 건설회사에 입사를 하다 보니 건설 현장의 특성상 술이 빠지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술 잘 마시고 일 잘하는 사람으로 통했다.

나만의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동기들 보다 어린 나이로 적지 않은 공사 현장의 소장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충분한 준비도 안 되었고 나의 능력으로 부족했던 업무처리가 어느 날 부터인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술 문제로 회사 일에 소홀하게 되었다.

부하 직원들에게 일거리는 떠넘기고 대외 활동을 빌미 삼아서 밖으로 돌며 매일 술을 마셨다.

크지 않은 지방 도시의 술집에서는 나의 유명세가 꽤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국 몇 년이 지나 현장을 끝냈을 때는 이미 몸에서 이상 신호가 왔다.

천성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몸에 몇 년 동안 술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 마땅했다.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한 결과 다시 술을 마시면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경고(간경화 초기)를 받았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술 없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병세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술을 찾았고 병원 처방으로 받은 약을 먹으면서도 술을 함께 마셨다.

그런 상태로 심신이 허약해지다 보니 회사생활도 점점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에 회사에서 알코올 의존증은 질병이고 반드시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당시 알코올중독치료병원이라는 것 자체에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많아서 온몸으로 거부를 했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무시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되면서 술 없이는 하루도 생활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더 이상은 이대로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에 중독치료를 결정하게 되고 올 1월에 알코올중독치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처음 입원을 했을 때는 그냥 격리 병동 생활에 적응하며 술만 안 마시는 상태가 지속되면 별 어려움 없이 건강을 되찾을 것인 양 착각을 했다.

알코올중독이 심각한 정신질환이라고는 깨닫지 못하고 3주 만에 조급하게 퇴원을 했다.

알코올중독자인 내가 가진 습관 중에 가장 결정적인 비극은 맞닥뜨린 현안에 대해서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결정장애가 내 자신을 빠드리지 않아도 될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문제는 나를 희생하면서도 감수하지만 정작 나의 절박한 건강 문제나 가족 간의 불협화음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더욱 술독에 빠져서 미쳐 버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맨정신으로 현실을 바라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기가 일쑤이고 그러다 보니 고난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돌파하지 못하고 항상 술 뒤에 숨어 버리는 비겁한 짓을 이 나이 먹도록 계속했다.

이런 천성적이고 후천적인 악습이 반복되다 보니 퇴원 후 1개월의 술 없는 기간을 간신히 버티고 난 후 음주 재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그 이전의 술로 망가진 생활로 되돌아갔고, 그런 성격적 결함에 치어서 힘든 생활을 하던 중 이번에 두 번째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음주 습관은 현실로부터의 도망이었고, 나의 실체를 숨기고 부정하는 도구였다.

어쩌면 많이 내성적이고 소심하기까지 한 나의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해 술을 마셨으며, 술을 마시면 용기가 나고, 못했던 이야기를 쏟아냈고, 그리고는 술 뒤로 숨어 버리곤 했다.

이제는 좀 더 솔직하게 나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새로운 내 모습을 그리고 싶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좀 더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앞으로는 살아야 하고 술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후회를 해봐야 지나간 버스일 뿐이다.

그리고 술로 인해 내가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실천할 수 있는지 지금 병원 생활 중에 깨달아보려고 한다.

삶에 있어서 박수는 못 받아도 손가락질은 받지 말고 살아가야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역사 속에 나오는 영웅과 소인배의 차이는 자기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앞으로는 내가 선택한 어느 것도 책임회피를 하지 않는 훈습을 해보겠다.

이젠 스트레스도 정면으로 응시를 똑바로 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도록 해보겠다.

술 뒤에 두 번 다시 숨지 않도록 이곳 예사랑병원에서 배운 대로 퇴원 후에 단주 생활을 하겠다.

나의 건강한 인생은 그 실천에 있음을 굳게 믿으며 이제는 나를 아끼고 가꾸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보고자 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복 받은 일을 꼽으라면 지금 이 순간도 항상 곁에 있어 준 아내와 자식들을 만난 것이 아닌가 한다.

술로 인해 잘못 엮어지고 드러난 그동안 고통의 시간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앞으로 시작되는 날들에서는 술이 없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아내와 가족들에게 웃음이 함께하는 행복한 일상을 선물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병원장님을 비롯한 치료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경험담을 맺는다.


           고맙습니다
.

                          알코올중독자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