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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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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의 모습은 지금도 정확이 기억이 나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1999년 5월 22일에 태어났으나 몇 시경이었는지 어느 병원이었는지는 누구한테도 들은 바가 없어서 지금도 출생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나는 지금 나의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기에 이글을 쓴다.
나의 어린 시절엔 가정에서의 행복한 기억은 거의 떠오르질 않는다.
그나마 행복했다고 기억나는 부분은 초등학교 시절에 또래들과 어울려 동네 골목을 뛰어다니던 순간 정도이다.
그리고 지금은 작고하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의 작은 추억이 전부일 정도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거의 매일 악다구니처럼 싸우셨다.
그들은 싸울 때마다 언성을 높이며 거친 말과 막무가내의 행동들을 보이셨다.
그럴 때마다 두 살 터울인 형과 나는 방문을 닫고 책상 밑에서 쭈그려 않아 숨을 한껏 죽이며 숨어있었다.
한번은 내가 울면서 싸우지 마시라고 했을 때 나에게 돌아온 것은 부모님의 일그러진 그들의 분노가 가득한 매질뿐이었다.
아주 어렸던 난 그래도 형을 믿고 많이 따랐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부모님의 분노는 별 이유 없이 어린 형에게 향했고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황당한 경우를 당한 형의 분노는 또 나에게 전가되었다.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형은 나를 갖가지 행동과 말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도 일방적으로만 당하다가 형에게 대들고 그러다 보면 형제간의 다툼이 커지면서 부모님의 무차별적이 폭력이 우리 형제에게 쏟아졌다.
24살인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한번은 어린 내가 식칼을 들고 형을 죽이겠다고 쫓아 다녔다.
물론 그 사건으로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어린 내 안의 분노는 상당하게 폭발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잠재된 분노는 어느 때고 터질 때만 기다리는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대며 항상 끓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회색빛으로 얼룩졌던 초등학교 시절은 끝이 나고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부터는 꽤 많은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다.
사춘기가 시작되던 시절이었고 다른 학교의 친구들까지 만나게 되니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즐거웠다.
이 무렵 나는 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또래들과 모이면 누가 어디서 구해왔는지도 모르는 많은 양의 술을 우리들은 엄청나게 많이도 먹어대기 시작했다.
완전히 취할 때까지 마시다 보니 마시면 토하고 다음날까지 또 토하고를 반복했지만 왜 이런 술을 아무 생각도 없이 자꾸만 마시는지는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집에선 언제나 이어지던 형의 폭력, 하지만 학교에선 친구들과의 즐거움이 공존하던 참으로 복잡 미묘한 중학교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서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고 학교 내에서도 많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러나 여학생과의 교제는 친구 정도의 그냥 그런 관계였는데 남자친구들이 나도 모르게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자꾸만 퍼뜨려서 와전된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을 하자 학교생활이 자꾸만 어려워져만 갔다.
마침내 지저분한 소문으로 인한 여자 친구는 정신적 충격으로 나에게 이별 통보를 했고 나 또한 어린 마음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살 충동까지 느낀 나는 자살 시도도 했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18살에 학교를 자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자퇴를 하고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도는 지경이라서 나는 그때부터 P.C 방을 자주 가게 되었다.
학교가 끝날 시간까지 P.C 방에서 지내다가 수업이 끝나면 정말 친한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지 않고 그냥 별 큰 사고 없이 시간을 죽이고는 했다. 
19살에 한 살 더 많은 20살의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 시발점이 나를 현재의 이 자리로 오게 하는 운명의 만남이 되었다.
그 여자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고, 매일 마셨고, 나 또한 매일 만나면 그 여자의 주량에 박자를 맞추다 보니 나 또한 매일 술을 마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당시 나는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혼자서도 술을 먹는 것을 보며 참 신기하다고도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일은 어느 순간부터 나도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을 했던 것이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그 무렵 친한 친구를 교통사고 잃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나의 술 주량의 한계점을 무시해버리고 혼자서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기절을 했다.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혼자서 술을 마시는 버릇이 돌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아직도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소주 두세 병을 사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공원 벤치등을 전전하면서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때로는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때론 침침한 과거사를 떠올리며, 그럴수록 세상에서 도망가고 싶어서 술을 마셨다.
술을 좋아하던 여자와는 우여곡절 끝에 이별을 한 후에 다른 여자를 만나서 교제를 했는데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 당시 나는 백수였는데 그 여자는 비교적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해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나의 음주 습관은 달리는 기관차처럼 무지막지한 행동이 동반되었으므로 그 여자는 나의 그런 술버릇을 고쳐주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결과는 아무런 변화 없이 나의 끝없는 추락은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택시비를 빌려 달라고는 해서 그 돈으로 택시는 안 타고는 걸어가면서 술을 사서 마시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아무런 자존심도 없는 정말 치사한 행동이었다.
그런 우리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끝을 맺고 내가 선택한 것은 작은 술집 아르바이트 생활이었는데 잠이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선배와 동기들에게 그런대로 신임도 얻고 하는 것이었지만 또 술이 문제였다.
점심시간에과 휴식시간에 술을 마시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밤늦은 시간까지 술에 취한 행동을 반복했다.
취한 상태로 시내버스를 탔다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서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정신을 잃고 하는 즉 필름 끓어짐 현상이 자주 생겼다.
새벽 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꼭 들르는 곳이 편의점이었다.
이유는 소주를 2~3병을 마시고 집에 가서 쓰러져 잠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세월속에 더 이상 돈도 없고 해서 아웃도어 전문매장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잠깐이 이나마 술을 줄여가면서 그런대로 건전한 생활을 하던 중에 또 같은 또래의 여자와 교제를 하게 되었고, 퇴근 무렵이면 둘이서 조그만 술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는 과거의 행동이 반복되었다.
그 여자와 외박을 하는 것도 모자라 작은 원룸 한 개를 얻어 동거를 시작했다.
그 무렵 부모님의 반대가 정말 심했지만 결국에 내 마음대로 선택한 동거의 결말은 끝없이 추락하는 몰골도 변했다.
서로가 술을 좋아하다 보니 매일을 하루처럼 일이 끝나면 소주 4~5병을 사서 T.V등을 보고 또는 이야기를 하면서 늦은 밤까지 음주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당시 그런 행동이 지금 여기 알코올중독치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지름길이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하던 일도 그만두고 이젠 밤이고 낮이고 여자 친구와 혹은 여자 친구의 친구까지 불러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매일 술을 마셨다.
다음날은 해장술이라고 하면서 소주 1병씩을 마시고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저녁 음식을 배달시키면서 또 술 파티가 광란처럼 이어졌다.
결국은 월세, 핸드폰 요금, 기타 등등 생활비가 부족해서 할 수 없이 직장을 구하려고 하던 참에 한 회사에 운이 좋게 정규직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2조 2교대로 하는 근무 방식이었는데 주간 근무면 퇴근 후 저녁에 술을 마시고 야간인 주는 아침에 퇴근 후 혼자 술을 2~3병씩 마시게 되었다.
그런 행동의 후유증으로 근무 시간에 잠깐 휴게실에서 존다는 것이 그만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회사의 분업화된 일의 분량을 놓쳐서 회사에 많은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
나로 인해 공정 전체가 완전히 멈추게 되어버렸다
회사 창사 이후 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인사과에 불려 간 나는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일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어대는 형국이었지만 나의 술버릇은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이었다. 
그날도 소주 4병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여자 친구는 다음날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것이 핑계가 되어서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술을 무한대로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나날이 지속되다 보니 술을 안 마시면 별의별 금단현상이 찾아와서 이젠 술을 안 마시고는 한 시간도 제정신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모텔을 전전하며 그런 생활을 이어오던 중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지만 술 마시는 행동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건강이 걱정이 되어서 어머니가 술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로 합리화를 들이대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집 근처에 소재해 있는 예사랑병원이라는 곳이 있으니 한번 만이라 동행해서 상담이라도 받아보자고 했을 때 내심으로는 알코올중독이라는 병명이 기정 사실화가 되는 것이 싫어서 차일피일 날짜만 뒤로 미루고 버텼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지금의 나의 모습이 탄로 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마치 내가 무슨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나중에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상담이라도 받아보자는 의견에 동의했고, 상담을 받아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베란다 등등에 술을 감추면서 방문 잠그고 술 먹고 하는 시간이 더 연장 되어질 뿐이었다.
이젠 더 이상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한계 상황에 도달했을 때 어느 날 방문이 열리며 생면부지의 사람 3명과 부모님이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때 나의 상식으로는 아무것도 이해가 안 되었지만 어쨌든 병원에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기어코 입원에 하게 되었다.
응급차에 실려 온 나는 진료실에서 원장님과의 병원입원치료 기간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게 되었는데 5~6개월은 필요하다는 말에 나는 순간 언성이 높아졌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입원 생활이 시작된다는 기분에 절망감을 느꼈다.
정말 가기 싫은 발걸음을 옮겨 보호실로 안내되고 말았다.
온 몸이 많이 상해서 며칠 동안 밥 대신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병실로 안내되어서 드디어 병동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모든 것이 낯설고 싫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놀라게 된 것은 기존에 내가 상상하던 정신병원의 환자들 모습이 아니었다.
먼저 생활을 한 모든 환우들이 상상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그 당시에 느낌은 너무나 멀쩡한 모습들이었다.
복도에 붙여진 병원교육프로그램 일정표대로 아침에 기상하고 식사를 마치면 1~2 시간 휴식시간을 갖고 치료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츰 병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24살인 내가 병동에서 가장 어렸고 하여간에 역시 답답하고 퇴원하고 싶은 욕구는 항상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는 처지라 별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지워나갔다.
그래도 나를 아껴주시는 선배 환우 분들의 배려와 부모님에게 미안함 마음으로 꾸준히 교육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을 하면서 조금씩 나의 마음과 행동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좁은 상식으로 판단하던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을 받으며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이 얼마나 치명적인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나 같은 알코올중독자가 내 주위에 정말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내 나이 24살에 처음을 입원을 한 경우도 상당히 운이 좋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예사랑병원에서 같이 생활하는 많은 환우들 중에 이제는 어찌 손쓸 방법도 없이 알코올중독이 만성화된 분들도 여러분이 있다.
알코올성치매가 의심되는 사람도 있고, 인격 장애가 온 사람 등등 여러 부류의 증상들을 갖고 있다.
이런저런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나는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반면교사로 삼아보면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많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였듯이 이왕에 병원생활을 시작한 것 나의 능력껏 교육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해서 반드시 단주생활에 성공하고 싶다.
그리고 1주일에 1회씩 정기적으로 상담도 받고 있다.
상담을 해주시는 분은 나이도 환갑이 넘으시고 본인도 알코올중독자로서 예사랑병원에 과거에 1년 동안 입원하신 경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리고 놀란 사실은 그분의 아들도 알코올중독자였지만 지금은 병원치료를 잘 받고 이젠 단주생활을 9년째 하면서 결혼생활도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사례가 바로 가족력이고 학습효과란 말씀을 상담 중에 해주셨다.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이 비록 치료는 간단하지 않는다 해도 본인의 확고한 치료의지와 할 수 있다는 믿음과 그에 따른 행동만 있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인생 게임 같은 것이라고도 하셨다.
“믿음이 용기를 의미한다.”라는 빅북의 글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나의 능력껏 그 글귀를 이해하려고 한다.
나무가 곧게 자라려면 잔가지들을 말끔하게 쳐주어야 하듯이 단주를 하려면  이것 저것 많은 생각(그것을 불필요한 망상에 의한 미봉책이라고 하셨음)을 간단하게 추려주고 명료하게 마음가짐의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단주를 하려면 배운대로 하는 행동(해결책)을 실천에 옮겨야 성공을 한다고 한다.
지금 병원생활 2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남은 병원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퇴원을하면 반드시 단주생활과 회복의 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로 새 삶을 꾸려가고 싶다.
지금까지 부족한 저의 경험담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코올중독자: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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