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경험담

  • 커뮤니티
  • 회복경험담

Notice: Undefined variable: _memberID in /www_root/admode/module/board/board.php on line 338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24-01-10
  • 조회123


내가 처음에 알코올중독치료 전문병원에 왔을 때는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는 미처 몰랐다.
그 당시에는 무조건 살고 싶어서 입원을 했다.
입원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참석하기 시작한 빅북, 12단계, 감정조절 프로그램등등 여러 가지 단주교육과정을 통해 중독이 얼마나 심각한 병이고 내 인생을 철저히 파멸을 시키는지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갔다.
교육내용을 들을수록 처음엔 무섭고, 불안감에 안절부절을 못하며 하루하루 막막한 심정뿐이었다.
내가 왜 알코올중독에 빠졌는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지금 글로 표현을하려고 한다.
난 딸 부잣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래서 내 이름엔 끝을 뜻하는 말(末)자가 들어간다.
종갓집 종부인 엄마는 꼭 아들을 낳아야만 했고, 내가 아들이기를 많이 바랐다고 한다.
내가 막상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세상에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존재였고 남동생이 태어나고서야 우리 집은 잔치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난 아빠의 옆에서 그림자처럼 붙어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기억이 있다.
아빠의 옆자리는 항상 나의 차지였다.
유일하게 딸들 중에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나 혼자였고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 한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점쟁이가 집으로 와서 굿을 했는데, 앞으로 사업이 잘 안 풀리고 집에서 세 명이 죽어서 나갈 것이라는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난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무당이 뿌리는 쌀과 대나무로 온몸을 내리치는 무당의 무서운 눈빛을 겨우 6살이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예쁜 원피스 두벌을 마련해서 연 년 생인 언니와 나에게 똑같이 입히시고 사진도 찍어 주셨다. 
무당의 말대로라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하필 나였다고 한다.
엄마의 손에 끌려서 어느 암자로 갔다.
그곳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어린 나는 뭔지 모를 공포가 밀려왔다.
스님과 엄마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엄마는 어디에 잠깐 다녀오신다고 하시고는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스님께서 “여기에 있으면 유치원도 보내주고 대학도 보내준다고” 하실 때 비로소 내가 아! 버림을 받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절 문 앞에서 돌아오지 않을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울기만 했다.
옆집 아저씨가 퇴근길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고는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물으시고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 집 근처까지 차로 태워다 주셨다.
이 모든것이 훗날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수수께끼 같은 나의 인생 여정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 이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아빠가 꼭 안아주셨다.
엄마는 울고 할머니는 나에게 집으로 왜 돌아왔냐고 큰 소리를 치셨고, 어지러운 흔적들만 집안에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울다 지친 난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지만, 이 사건은 평생 내 마음 아주 깊은 곳에 꽁꽁 묻어두고 살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얼마를 지나지 않아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또 언니가 내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리고 내가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일도 경험하게 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할머니는 노환에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고, 언니는 교통사고, 아빠는 간경화였지만, 그리고 어른들의 판단 착오로 사업도 망한 것이지만, 그런데 이런 사건으로 인해서 내가 왜 욕을 먹고 눈치를 봐야 하는지 그때는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
이 일은 내 나이 서른쯤에 처음으로 엄마가 나에게 “미안하다. 그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한마디로 잊혀져갔다.
집안은 기울어 가고 엄마 혼자 감당하기에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빚은 너무 많았기에 난 대학을 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이나 하라는 말에 나의 본격적인 반항은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이미 다른 선택권이 없었으므로 해서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실컷 놀고 보자고 하는 반항심으로 고등학교 입학 후 말 그대로 그냥 놀았다.
같은 참고서를 몇 번이나 산다고 거짓말로 용돈을 받아서 놀고 또 놀았다.
콜라텍, 디스코텍, 나이트클럽 등등. 학생 신분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을 전전하며 놀고 또 놀았다. 
고2 겨울 방학 때 친구들이랑 나이트에 놀러 갔다가 애들 아빠를 만났다.
처음엔 아빠 같은 아저씨가 참 좋았고 마냥 편했다.
그리고 사랑이란 것을 알기도 전에 임신을 하고 말았다.
임신 4개월이 될 무렵 언니에게 부탁해서 같이 산부인과엘 갔다.
의사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심장 소리를 한 번만 더 들어보라는 애기에 태중의 아이 심장 소리를 듣고는 차마 저버릴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아이를 선택했다.
그 애가 지금의 예쁜 내 딸이다.

그 후에 속전속결로 약혼식에 이어 결혼식으로 이어지는 시간 들 속에서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19살에 애 엄마가 되었고, 20살에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나는 그저 시댁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살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좋았다.
친정집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나만 잘하면 되겠지 하는 오만한 생각으로 살았다.
그런데 시집살이는 생각과는 달리 너무 힘들었다.
너무 빨리 20살에 어른이 되어야만 했기에 내 생각과 의지는 필요 없이 시댁 식구들의 노예처럼 내 삶이 좌지우지 되었고,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고 궂은일은 다해야만 했다.
그런 힘든 나날이 지날수록 난 몸과 마음이 시들어갔다.
잠이 모자라서 커피에 의존해서 항상 깨어있어야만 했고 빈혈에 영양 불균형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분가를 권유하셨다.
빈손으로 겨우 분가를 했지만, 숨을 쉴 수가 있어서 마냥 행복했다.
그때부터 돈독이 올랐는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과 나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적금을 부었다.
돈만 생기면 저축부터 했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이사 가는 날 너무 행복했고 앞으론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다. 
또 아들이 태어나고 나도 조금씩이나마 어른이 되어간다고 느끼며 착실하게 살아가던 시기에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IMF라는 것이 터졌다.
건축업을 하던 남편은 많이 힘들어했다.
그 이후 일감도 줄어들고 쉬는 날이 많아지면서 남편은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도박과 술에 빠져들었고, 주사는 점점 심해져갔다.
짧은 하얀 행복 뒤에 이어진 또 다른 검은 불행과 함께 찾아온 남편은 점차 괴물도 모자라서 악마로 변해져만 갔다.
숨이 막히도록 내 인생이 답답해져갔다.
작은 아파트로 집을 줄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서로가 약속도 여러 번 했지만, 남편은 점점 더 도박과 술 그리고 여자 문제와 더불어 가정폭력이라는 끔찍한 현실이 도래했다.
취하면 마구 때리고 나서는 술이 깨면 무릎 꿇고 빌고 하는 악순환의 고리는 끓어질 줄 몰랐다.
그런 악몽이 되풀이되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지쳐버린 나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져 있었고, 한 잔 두 잔에서 어느덧 한 병 두 병으로 점점 난 알코올이라는 늪에 빠지고 있었다. 
한 집에서 각방을 쓰며 별거를 2년쯤 했을때에도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남 보기에는 멀쩡한 척 했지만, 이미 부부관계는 곪을 대로 곪아만 갔다.
정신과 육체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한계점에 도달할 때쯤에 친정에 모든 사실을 알리고 이혼을 결심했다.
엄마의 강한 반대에도 난 이혼했고 위자료 한 푼 없이 정리했지만, 두 아이만이 나의 힘이었고 희망이었다.

이렇게 보고 배울 것 없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보다 차라리 나 혼자 키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신랑은 나에게 들러붙은 혹 같은 존재로 여기며 훌훌 떼어버렸다.
엄마의 냉정한 한마디는 이혼이란 우리 집안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마산을 떠나서 멀리 떨어져 살다가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들이 이해를 할 수 있을 때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너무도 막막했지만, 객지 생활도 살고자 하니 또 죽지 않고 살아졌다.
원룸 월세에서부터 4번째 이사 후 집 장만도 했고 아이들은 너무도 바르게 잘 자라 주었다.
내 체력이 용납하는 한 하루 3시간씩만 자면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비록 힘들어도 자유를 누릴 수 있어서 희망이 있는 나날들이었다.
청주에 이사를 온 후 15년이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말 억척스럽게 살았다.
엄마 겸 아빠 역할도 해야 했으므로 난 강해야만 했다.
항상 아이들에게는 정직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정작 나는 분노와 복수심과 함께 이기심이 차디찬 돌처럼 굳어져만 갈뿐 부드럽게 풀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알 수 없는 인생이 공허함과 외로움에 애들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가끔 폭주로 이어져가기 시작했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면서 종합검진, 입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조금 나아지면 또 마시고,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조절 음주가 가능했다고 착각을 했었다.
딸아기가 대학을 졸업하고 아들이 군대 갔을 때 이젠 조금씩 쉬어가도 된다는 안도감에 일도 줄이고 여행도 다니고도 했지만, 항상 나의 곁에는 술이 빠지지 않는 알코올중독자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그 당시에는 절실하게 느끼지를 못했다.
그러던 작년 겨울 애들 아빠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왔다.
15년 만에 온 첫 소식이 죽음이라는 현실이었다.
너무 허탈했다.
나중에 보란 듯이 그동안 복수를 생각하고 분노 심으로 가득 찬 세월이었는데 그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린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고 그 대신 내 마음은 분노로 가득차서 가슴이 터질 것 만 같았다.
애들의 의견을 묻자 지난 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장례식에 참석 하겠다고 해서 난 애들을 데리고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힘이 풀리고 회환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오열과 분노 그리고 뭔지 모를 후회 때문에 한참을 울다가 보니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해졌다.
난 비록 양육으로 힘들었지만, 아이들의 재롱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예쁜 모습으로 커가는 것을 다 만끽하고 산 것만으로도 내가 이겼다. 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은 말년까지 쓸쓸히 홀로 술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을 때까지 참 많이도 힘들었겠구나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결코 용서는 안 되었다.
난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잘 커 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엄마도 열심히 살았노라고 할 때 아들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이젠 엄마 괴롭히지 마시고 부디 좋은 곳으로 잘 가세요.’ 라 하면서 흘리던 아이들의 눈물을 난 살아서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장례를 치르고 아들이 자대로 복귀를하는 다음 날부터 난 술병을 들었다.
그 당시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고, 이런 나의 마음을 이야기 해보았자 친정엄마는 속상하시고 언니들은 걱정만 할 텐데 하면서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그 대신 술을 벗으로 삼아 주구장창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알코올이라는 터널에 스스로 갇혀버렸다.
원망, 분노, 상실감, 죄책감등으로 뭐라고 한 마디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감정 속에서 계속 술에 의지하며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날 무렵엔 다리에 힘이 없어서 일어날 수도 없으니 더 이상 술을 사러 나갈 힘도 없게 되었다.
문득 바라본 거울 속 내 모습은 악마 같았다.
평탄하지 못했던 나의 지난날은 술을 마시는 행위로 건강이 망가지는 아주 비싼 수업료를 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알코올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난 억울해서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입원을 결정한 날 딸에게 소주 한 병을 부탁해 미련 없이 마시고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주치의와 짧은 상담을 한 뒤에 병동 회복실이라 불리는 보호실로 갔다.
순간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꼈다.
주사를 맞는 엄마가 잠드는 것을 보고 병원을 나서면서 딸아이가 참 많이도 울었다고 했다.
2~3일 동안 잠만 잔 것 같다.
그 후로도 시간이 좀 흘렀지만 아직은 멍한 상태로 해독반 교육프로그램에 참석해서 알코올중독이란 질병은 뇌의 질환이라는 등등의 교육과 함께 1주, 2주 지나면서 차츰 안정감을 찾아갔다.
하지만 첫 주에는 금단증상을 너무 심하게 겪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온몸에 바늘을 뿌리고 혈관 속으로 바늘이 지나가면 하나하나 주사 바늘을 제거하는 것 같은데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바늘의 숫자들......
그리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어지는 심한 수전증은 결코 살아생전에 잊지 못할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병원생활 한 달, 두 달, 세 달.....
어떤 때는 단주의 자신감도 생기다가 반대로 단주를 못할 것 같은 마음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양가감정을 충분히 경험하는 당시의 병원생활이다.
술 마시는 꿈을 꾸기도 하고 평상시 감정조절이 안 될 때도 있고, 혹은 불안과 희망 그리고 절망감 이런 모든 것이 순간순간 왔다 갔다 한다.
주변에서 같이 생활하는 환우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또는 퇴원 후에 재발을 해서 다시 입원하는 그들을 보면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단주를 향한 나의 열망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병원에서 배운 대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최선을 다해서 해보자.
어제보다 오늘이 좀 더 좋아졌고,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나아져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병동생활을 하다 보니 불안감과 조급증도 많이 없어졌다.
오늘 내가 한 일들이 후회되지 않도록 내일의 꿈을 꾼다.
병원에서 나의 모든것을 달라지게 하거나 바꾸어 주지는 않는다.
나의 건전한 생각과 부단한 단주의 노력, 그리고 하나님의 힘과 함께 가족들의 사랄을 믿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이제부터는 또 하나의 믿음 A.A. 안에서 단주의 열망을 더 가져 보려한다.
외부 단주모임에 참석했을 때 그곳 모임 안에서 따듯하고 평온함을 느꼈다.
알코올중독자들끼리만 경험담을 말할 수 있고 서로가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느끼는 감정들을 난 분명히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계기로 나도 모르게 입이 열리고, 멤버들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느낌을 난 분명히 느꼈다.
내 마음속에 아주 얼음처럼 차갑게 감추어졌던 검은 상처의 응어리들을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모임 안에서 쓰레기통을 비우듯 시원하게 털어놓겠다.
빅북에 이런 글이 나를 고민하게 했다.
[알코올중독자들에게 술은 상징(象徵)에 불과하다.] 라는 글귀다
'빙산의 일각' 이란 눈에 보이는 부분보다 물밑에 숨겨진 알코올중독의 보이지 않는 실체가 더 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 밑바닥과 내면에 깔린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단주 공부를 이제부터는 모임 안에서 해야 한다.
결코 나에게는 술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정신적으로 뇌의 질환까지 진행된 알코올중독의 근원인 나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을 서두르지 않고 소의 걸음처럼 천천히 걸어가겠다.
앞으로는 나를 더욱더 사랑하고 내가 중심이 되는 정신세계에서 나의 꿈을 마음대로 펼쳐보는 그런 단주의 첫걸음을 내딛으며 묵묵히 걸어가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이 말을 좋아하고 믿고 싶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보이는 것은 노력이라는 진실을!]
입원 생활 중에 이글 경험담을 쓰면서 나의 질병 치료에 협조를 아끼지 않으시는 원장님을 비롯한 치료진들과 지금도 생활을 같이하는 환우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알코올중독자 M

(追伸): 현재 나는 A.A 멤버로 단주의 길을 3년째 성실히 걸어가고 있다.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