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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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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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33년을 살아온 청년입니다.
아버지는 상고 출신으로 전기기술자로 경제활동을 하셨는데 나와 동생이 소위 말하는 강남 8학군에서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은 좋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가족사로 인해서 초등학교 정도를 졸업하신 관계로 본인이 부족한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자식들의 공부에 대한 집념이 많으셨습니다.
저의 성격은 선천적으로 겁이 많고 유약하면서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아버지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는지 남자답게 키운다는 명분 아래 강압적으로 성격 개선을 요구하셨지만 저는 기대에 따라가지를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물을 무서워했지만 아버지는 저를 강제로 물에 빠트려서 허우적거리게 만들다 보니 그 후 저는 물에 대한 극심한 공포심을 가지게 되어서 지금까지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훈육으로 지금도 운다는 사실에는 강박적인 부정적인 감정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가기 싫어하는 교회를 저를 동반해서 다니시기를 원하셨는데 초등학년 6년 때 밥그릇을 집어 던지며 나의 의사 표현을 한 이후로는 어머니의 태도도 다르게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항을 폭력적으로 하면 나의 의사가 전달된다는 사실을 비뚤어지게 알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물론 교회도 안 다녔습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는데 사춘기 시절에 폭력성이 서서히 나의 행동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겁을 주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새로운 수법을 터득한 후에는 학교에서도 또래보다 덩치가 큰 몸집을 내 새워서 효과적으로 써먹기 시작을 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한 후에는 점점 폭력성이 눈에 띄게 나타나면서 술과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을 했습니다.
중학생 신분이었지만 편의점 판매원에게 적당하게 얼버무리면 동급생들과는 달리 저는 담배와 술을 구입하는데 비교적 쉬운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 원하는 바와는 달리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1주에 몇 번 번 정도는 담배와 술을 즐기는 처지로 점차 변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나태한 생활 태도는 더욱 나빠져서 무단결석을 수시로 하는 한심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수능점수는 형편없이 나왔지만 대학교 3곳에 전형을 넣으면서 저의 성적이  한심한 것도 또 분수도 모르고 상향 지원을 하는 바람에 모두가 당연하게도 낙방 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현실 도피를 한곳이 군 입대였습니다.
군 생활 중에도 술 문제가 발생을 했는데 폭음을 하면서 정신을 잃어버리고 상급자에게 기억에도 없는 하극상을 벌여서 그 벌로 2주간 정신교육대를 다녀오는 벌칙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 나의 불찰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정면 돌파를 하지 않고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도피해 버리는 나쁜 습관이 고착화가 되는 과정을 겪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휴가 중 성수대교에서 강물로 뛰어내리는 자살 시도를 흉내를 내면서 어설픈 짓거리도 해보았습니다.
그 사건 이후 우울증 판정을 받아서 군 병원 정신과 치료병동에 입원을 하면서 몇 개월을 보냈지만 마음속으로는 저의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군의관들하고 정신과 상담을 하면서도 온갖 잔머리를 다 굴리면서 순간순간의 염치없는 행동을 이어가는 젊은 날의 군대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역 날짜는 어김없이 돌아와서 남들이 보기에는 멀쩡하게 군 생활을 마감하고 2011년 전역을 했습니다.
     
전역 이후 이상한 행동의 변화가 생겼는데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다른 일행과 시비가 붙었는데 친구들도 모르게 시비를 한 그 사람들을 술집 밖으로 따로 불러서 주먹 다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내성적이고 겁이 많던 내가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술이 깬 다음날엔 나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의 강박적인 성격이 다행하게도 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다 보니 군입대 전에 계획을 세웠던 수능 재도전의 행동을 실천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정직하게 그 당시를 돌아보아도 군 생활 2년 동안 상시 음주를 못해서 그런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음주조절이 그런대로 가능했습니다.
2012년의 대부분은 수능준비를 하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음주를 전혀 하지 않았고 술에 대한 갈망감이나 불안과 초조함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음 해에 제가 원하던 대학에 입학을 하는 짜릿한 순간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사자성어는 저에게는 너무 맞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학과 동시에 음주량과 횟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수험생으로부터의 해방감과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은 착각이 황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특히 나의 행동의 자유가 보장된 대학 문화 자체가 해방구였습니다.
특히 음주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자체가 너무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술로 인해서 계속 발생 되는 원치 않는 문제점들이 수시로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언행에 간섭을 해서 인간관계가 생각보다 심각하게 망가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술에 만취를 해서 어린 후배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에 주제넘게 훈계를 하다가 다툼이 생기고 다른 학생의 학점의 높고 낮음을 함부로 평가하면서 저의 인격을 망가뜨리는 행동 자체를 멈추지 못했습니다.
차마 글로 다 하지 못하는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끓임 없이 이어지는 대학생활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숙하는 기분으로 술을 당분간 마시지 않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고는 했지만 술을 마시면 평소와 전혀 다르게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면서 어느덧 나의 별명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라고 서서히 굳어져 가고 있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학생과 교제를 할 기회도 있었지만 반복되는 술 문제로 인해서 지속적인 건강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여자친구의 권유로 보건소에서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담당의사가 하는 말이 저는 앞으로 한 잔의 술도 마시면 안 되는 유형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음주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저는 그런 상담 내용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거의 매일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았고 음주량 역시 저의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남보다 타고난 지능지수 덕분인지 그 당시만 해도 학점은 항상 상위권이어서 음주 문제가 저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를 안겨 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머리가 좋아서 놀면서도 공부를 잘하니 얼마나 좋겠어.’라는 소리에 우쭐대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2학년이 되고부터는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술 문제로 인해서 집중력 현저히 떨어져서 공부에 소홀하다 보니 서서히 바닥이 드러나면서 불안과 불만이 쌓였습니다.
그럴수록 멀리 해야 할 술은 더 가까이 두고 마셔대면서 학생 신분을 망각했습니다.
어느 날은 과 선배의 방에서 술에 취해 소변을 이부자리에도 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서서히 손 떨림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는 아무런 문제도 아닌 것을 트집 잡아서 싸움질을 해대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이성 교제도 나의 희망과는 달리 술에 취한 상대방들의 실망감으로 얼마 안가서 지저분하게 막을 내리고는 했습니다.
이 시점에 부모님들도 나의 과도한 음주 문제의 심각성을 알기 시작을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부모님들의 별거도 함께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입도 시원찮아서 재정지원이 원활하지가 않다보니 아르바이트도 않으면서 대학생활을 하던 풍족했던 봄날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술값도 떨어지다 보니 큰소리치며 동료들과 마신 술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에 접어들면서 차츰 혼자 술을 마시는 횟수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럴수록 젊은이답게 현재 상황을 정면 돌파를 해야 하는데 반대로 술을 마시기 위한 자기 정당화와 합리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교성 음주에서 어느 순간부터 도피성 음주로 음주 동기가 변했습니다.
문 밖의 출입도 술이나 담배를 사로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방구석에서 오직 혼 술로 하루하루를 허망하게 보냈습니다.
걱정이 돼서 찾아온 지인들의 방문이나 격려의 말도 모두 귀찮고 짜증만 났습니다.
교생실습도 나가지를 않아서 교수님들의 걱정과 당혹감은 상당했습니다.
폭력성은 도를 지나쳐서 여동생이 마우스를 빌려주지 않는다고 마우스를 뺏어 부수고 이를 본 어머니가 새로운 마우스를 사오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사들고 오는 마우스마다 때려 부수는 개망나니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무렵부터 저의 알코올중독증상은 이제 상당히 진행이 되어왔던 것 같습니다.
나의 난폭성에 놀란 동생은 자취방을 구해 집을 나갔고 당시 어머니와 대소변도 못 가리는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와 생활을 하던 중에 그 날도 친구와 밖에서 술을 마시는 시간에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술 값을 안 준다고 행패를 부렸는데 이유가 문상을 온 친구들에게 사줄 술값도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황금만능주의에 미쳐있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술에 취해 밖에서 맴돌았고 그 후로도 미쳐 날뛰는 나를 두려워한 어머니는 제가 폭발하지 않을 정도로 전전긍긍하면서 술값을 주시고는 했습니다. 
한 번은 술에 취해서 고성방가를 하면서 난동을 부리니 경찰이 출동을 했고 사건처리 과정 중에 보호자 신분으로 아버지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경찰에게 보란 듯이 자식으로는 하면 안 되는 폭언을 아버지에게 심하게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술 좌석에서 상식수준 보다 지나치게 남녀의 성기를 지칭하면서 성희롱으로 여자 후배를 난감하게 만들다 보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도 모두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두 사건 이후에 심한 죄책감과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이 심해지다 보니 사람들과의 건강한 교류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조절 음주를 하고 싶어서 독한 소주에서 순한 맥주만 마셔도 보았지만, 그것도 만취를 해야만 멈추는 상황이 되었고 통풍의 극심한 통증으로 잠시 음주를 중단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음주 후 버릇 중에 음주운전을 하는 악습이 하나 추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임용고사 선발 인원의 급증으로 학과 동기들이 대거 합격한 것에 심한 박탈감과 함께 세상에 대한 분노심이 쌓여 갔습니다.
이는 다시 폭음을 하는 좋은 투사 대상이었고 아무것도 안 하고 대가만 바라는 아주 좋지 않은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소변도 제대로 못 가리는 폭음이 계속되었고 이모님 환갑잔치 자리에선 외가댁의 지난날 우울한 사건을 들먹이면서 즐거운 모임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패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금전적으로 별로 여유 없는 어머니를 협박과 공갈로 집 보증금 빼서 학원비를 지원을 하게 해서 임용고사 준비를 시작했지만 또 음주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소리치면서 한다는 소리가 술을 마셔도 시험에는 합격을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쳐대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미친놈이 되어서 소리를 지르다보니 동네 사람들이 신고를 해서 경찰이 출동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습니다.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이런 사례가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어머니의 하소연에는 회피로 일관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제 때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교회까지 찾아가서 온갖 악다구니를 다 퍼붓다 보니 주위에 있던 교회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어머니의 체면은 두말할 것도 없고 저의 행동 문제에 따른 인간관계의 모든 악영향을 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한 지경으로 변했습니다.
이젠 술에 취한 상태나 아닌 상태나 큰 차이가 없이 수시로 일어나는 감정조절 능력의 결여와 비정상적인 자기중심적인 사고 체계의 붕괴의 현실성을 부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다 보니 하루하루가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안 해도 나의 젊은 청춘이 술에 치여서 비극적으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가장 슬프고 암담했습니다.
이렇게 지금 이런 식으로 술 문제에 저의 삶이 침몰하다 보면 앞날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는 절망감에 결단을 내려서 알코올중독치료병원에 입원을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입원 생활 중에 깨달은 것을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알코올중독은 심리적, 의학적[약물포함]치료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사고방식과 성격적 결함에 대한 자기 주도적 개선이 요구되는 질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강박적 음주를 초래한 내적 요인들에 대한 철저한 자기 검토와 이를 객관화하는 과정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술의 양과 회수를 조절 능력의 상실로 조절 음주가 불가능하며 영구적으로 음주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절 음주의 불가능함을 그동안의 음주 경험으로 익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입원 후에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음주에 취약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견하여 충분히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알코올중독자의 의지력 하나로는[알코올중독은 뇌의 질환이므로] 단주를 유지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과 해결책으로 단주 모임(A.A.)의 효과와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교육내용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음주 촉발 요인으로 작용하는 성격적 결함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음주 행동의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서 제가 개선해야 할 부분을 찾아 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만심, 인내심의 부족, 이중적 성격, 충동적 사고 등등 많은 근원적 결함이 무엇인지 아주 깊게 되짚어 보는 소중한 병원입원 시간들이었고 구체적인 과거 사건들이 나의 성장 과정에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작용을 하였는가를 검토를 해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음주 문제로 발생한 문제 행동을 확인하고 인정하면서 무절제한 음주가 비이성적인 판단에 어떤 형태로 작용했으며, 절제되지 않은 감정표출의 수단으로 음주를 무기삼아 함부로 사용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음주로 인한 문제 행동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받은 가족, 친지, 친구 그리고 그들 외에 저와 관계를 맺은 수 많은 사람들의 상처에 대해서 깊은 죄책감과 반성이 있었습니다.
저의 회복과 단주 생활을 위해 반드시 진심어린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주 생활부터 해야 가능하다는 진실도 알았습니다.
예사랑병원에서 생일과 새해를 맞이하며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음주 폭력으로 발생한 어두운 과거는 걷어버리고 퇴원을 하면 밝은 미래로(A.A.)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제부터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렵니다.
고맙습니다.

                  알코올중독자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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